오지 여행
나에게 여행은 오지(奧地) 찾아다니기와 동의어다. 관광객의 흔적이 적은 곳, 사람의 흔적이 적은 곳, 옛 모습이 가능한 잘 보존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파리의 팬시한 셍제르맹데프레 뒷골목도 좋고 봉마르셰에서 쇼핑하는 것도 좋고 샹젤리제극장에서 연주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오지가 더 좋다.
10년 전 ‘도베’라는 여행잡지에서 여행기 요청했을 때 거절했다. 내가 즐겨 다니는 곳이 우리나라 여행자가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소음, 훼손, 존중하지 않음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거슬리거나 기분이 상할 수 있겠지만, 조금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많은 관광객이 외국에서 보여주는 타지 문화/사람에 대한 존중은 유쾌한 느낌은 아닐 것이다. 문화에 대한 우열 나누기, 타인에 대한 무의식적 혹은 습관적인 ‘어디 어디 애들’과 같은 단어 사용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잘 보존된 자연, 잘 보존된 문화에는 국적이 없다. 누구나 구분 없이 즐기고 보존해주고 존중해주어야 하는 유산이다. 진정 여행을 좋아한다면 원하는 곳을 찾아갈 것이다. 유명 관광지에 대한 소개는 이미 널렸다.
오지여행을 쉽게 소개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음식이다. 오지엔 한국식당은커녕, 중국식당, 일본식당도 없다. 밥을 굶거나 밥이 그리우면 여행이 즐겁지 않다. 서양음식, 특히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은 오지의 음식을 느끼하다고 여기는 만큼이나 배고프고 고달픈 여행이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오지는 대부분 한국관광객에게는 맞지 않는 여행지가 많다. 이국적 풍경뿐 아니라 문화와 음식을 함께 즐긴다면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된다.
드문 손님
극히 드문 손님을 만났다. 나와 비슷한 여행을 좋아하는 여행객을 만났다. 한국에 처음 오는 손님임에도 안동, 경주, 부산을 방문지에 포함했다는 것이다. 처음 오는 외국인이라면 가능한 한 짧게 서울에 잠깐 머물고 모험을 하려 들지 않는다. 한국을 꼭 방문해야 한다면 시간을 나누어 일본이나 중국에 더 할애하는 외국인을 많이 보았다. 대부분이라 해야할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일본과 중국은 이미 자주 여행했었다 한다. 그리고 일본은 언제나 좋아하는 여행지지만, 일본의 원전사고의 심각성은 우리가 뉴스에서 보던 것 이상으로 심각하며, 체르노빌에 비할 바가 아니라며 당분간은 절대적인 일본여행 자제를 권했다.
이번 방문손님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아니라 revhwany님의 여자친구의 부모님이다. 이분들이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할 예정이었기에 revhwany님은 더불어 시골집을 방문하고 싶어했다. 아프리카 레위니옹(Réunion)에 사는 분들이었다. 레위니옹은 마다가스카르에서 동쪽으로 800킬로 정도 떨어진 작은 섬이다. 프랑스의 여러 재외영토 중 하나로 유럽연합에 속한 유로존이다. 얼마 전 사진으로 집과 주변을 봤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는 상상하고 있다. 바다도 아름답지만, 산의 숲, 계곡, 폭포가 마치 파라다이스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일행은 안동 하회마을을 들렀다가 오후 늦게 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오후 일찍 연락이 왔다. 영주 부석사를 들렀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중이라며 시골집으로 곧장 도착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시골이라 준비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부침개 용으로 뜯어놓은 앞 밭의 부추와 미나리, 한국식으로 가볍게 양념한 돼지고기와 빵을 구울 때 빼놓은 숯이 준비되어있다. 그리고 바게트와 호밀빵이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온다니 어떤 분들인지 상당히 궁금했다. 프랑스 영토이지만, 원주민 출신인지 순수 프랑스인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문화를 알겠지만, 대화가 가능할지도 궁금했고 내심 걱정도 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여행의 유형으로 보아 상당한 견문을 지닌 사람으로 예상했다.
도착 후 첫 이미지에서 이미 상당한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60 전후의 나이로 보였지만, 한쪽 목발을 짚고 있는 것으로 짐작하건대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앉을 자리를 권하기 전 먼저 옆 종택과 주변을 둘러보도록 권했다. 앉아서 식사를 시작하면 어두워져 주변을 보고 느끼기 어렵다.
시골집 주변은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과거를 떠올리는 지역이다. 가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있다는 느낌이 가끔 들기도 한다.
저녁은 시골마당에서
식탁은 마당에 준비했다.
부침개와 함께 막걸리로 시작했다.
부침개와 막걸리를 타고 이야기는 와인으로 흘렀다.
끝없는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와인, 음식, 식당, 미술, 음악, 등등.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온 분이라 공유할 이야기가 많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고 – 특히 내가 여행한 아프리카는 고생했던 모로코밖에 없기에 –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끝없이 이을 것이라고는 상상치 않았다. 지금까지 본 어떤 프랑스인보다 더 많은 경험을 지닌 분이었다.
닥터 빠듀
빠듀 씨는 – 성이 빠뜌(Padieu)다 -부르고뉴에서 의사생활을 오래 했었다. 뫼르소(Meursault)와 지브리-샹베르텡(Gevry-Chambertin)을 포함해 부르고뉴 여러 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집안이 오랫동안 대대로 의사였으며, 빠듀 씨 아버지는 콜레스테롤에 있어서 고밀도지질단백질(high density lipoprotein)와 저밀도지질단백질(low density lipoprotein)가 있다는 것을 규명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한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역시 의학계에서 무언가 중요한 발견을 했었다고 했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빠듀 씨는 레위니옹의 위생담당 최고위 책임자로 지내다 얼마 전 퇴임했다 한다.
미식
많은 이야기 중 음식, 와인 이야기는 빠지기 어렵다. 음식을 좋아하는 정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미 막걸리를 즐기고 있었다. 막걸리에 든 약간의 인위적인 발효까지 꼬집었다. 이웃 농장에서 가져온 계란 하나에서도 이미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맛있다며 깨끗하게 닦아서까지 맛있게 드셨다.
화덕 이야기도 한참 이어졌다.
빵을 굽기 위해 하루 혹은 이틀 동안 불을 때는 이야기,
화덕에 온도를 유지하는 이야기,
화덕에서 구운 빵 이야기,
왜 오르가닉 밀가루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이스트는 무엇으로 만들어야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
일부 유명 셰프는 레위니옹에 오면 빠듀 씨 집에서 빵을 가져간다는 이야기 등등.
레위니옹의 미식
레위니옹은 생선이 아주 뛰어나다 했다. 지중해 생선이 맛있지만, 레위니옹에 따르기가 어렵다 했다. 나 역시 지중해 생선 맛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더우기 빠듀 씨의 미식에 대해 신뢰가 갔기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여행과 함께 레위니옹의 미식을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바닐라!
마다가스카르산 바닐라 두 줄기를 10유로 넘는 금액으로 내가 자주 들러는 식료품상에서 구입한 적이 있다. 나는 마다가스카르의 바닐라가 세상에서 최고인 줄 알고 있었다. 최고의 바닐라는 레위니옹이라니. 다시금 세상은 넓고 내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레위니옹은 오래전 부르봉(Bourbon)의 섬으로 불렸고 레위니옹의 바닐라는 ‘부르봉의 바닐라’로 불리기도 한다 했다. 바닐라를 보내주겠다는 약속도 빠지지 않았다.
커피, 코코아까지 좋으니 미식을 위한 모든 것들이 가능해 보였다.
야생 고기, 최고의 생선, 향신료, 커피, 코코아.
그리고 중요한 화덕.
빠뜨리면 안될 무엇보다 중요한 ‘음식을 제대로 아는 미식가’까지 있으니 어떠한 미식인들 불가능할 것인가?
딸은 디저트 담당이라 한다.
유기농 밀, 코코아, 코코넛…. 등으로 화덕에 구운 과자가 먹고 싶다.
로마네콩티는 역시나
와인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빠듀 씨는 꼬뜨드뉘, 특히 지브리-샹베르텡을 좋아한다고 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르고뉴 와인은 지브리-샹베르텡으로 여기고 있었다. 지금도 부르고뉴 와인을 5백 병 남짓 가지고 있으며 주로 예전 부르고뉴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중, 치료나 왕진을 하면서 받은 선물이라 했다. 선물이라 특히 좋은 와인들이 많다한다.
와인이야기가 이어지는 중 DRC(Domaine de la Romanée-Conti)이야기도 나왔다. 빠듀 씨는 DRC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유는 잔꾀를 부리는 와인이기 때문이라 했다. 문제의 소지 때문에 이글에서 이름을 명확히 밝히진 않지만, 분명한 것은 로마네콩티에 특별한 ‘것’을 사용한다 했다.
나 역시 로마네콩티에서 대해 좋은 느낌은 아니다. 오래전, 로마네콩티를 마시면서 순수한 와인에서 나타날 수 없는 색과 향에 불쾌함을 토로했지만, DRC 애호가들은 그 특별함(나에게는 이상함)이 로마네콩티만이 가지는 특별함으로 인식하고 있다. 로마네콩티의 맛이나 향에 대한 불편함이나 비난은 로마네콩티를 마시는 ‘선택된’ 사람에게는 ‘신성한’ 로마네콩티에 대한 ‘신성모독’으로 결론난다.
내가 느끼는 로마네콩티의 불편한 색, 향, 맛에 대해 빠듀 씨는 명확한 근거, 이유를 밝혀주었다.
와인을 알고 맛을 제대로 느끼고 즐기는 미식가라면 DRC와인 모두는 아니겠지만, 불편한 향과 맛을 경험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DRC 와인 이외에도 유사한 향과 맛이 느껴지는 와인이 늘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이곳 시골집에서 안동까지는 1시간 조금 덜 걸린다. 밤이고 초행이라면 1시간은 잡아야 한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향하고 딸은 눈치를 주지만, – 대단한 인품의 부인은 전혀 티를 내지 않고 – 빠듀 씨는 이야기를 멈추질 않는다. 나서려고 일어선지 이미 30분이 넘었지만, 이야기는 끝이 없다.
음식, 와인, 여행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실천하고 즐기는 사람이 많지 않을뿐더러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이 유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빠듀 씨 역시 쉽게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 역시 잠자리만 편하다면 이곳에서 더 이야기 나누고 주무시고 가도록 권하고 싶었다. 그러나 네 사람이 편히 쉴 만큼 충분한 이부자리가 없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회마을 유감
다음 날 오전에 전화가 왔다. 하회마을 들렀다 경주로 나서는 길이라 했다. 하회마을에 대해 너무 실망한 나머지 금세 나왔다고 했다.
걱정했던 것 이상으로 실망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하회마을은 20년 전 처음 방문한 이후 몇 번 갔었다. 최근 방문은 5년 전쯤이었다.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생산자인 미쿨스키 부부, 메오-까뮈제(Meo-Camuset)의 쟝 메오 등 여럿이 시골 방문을 요청했을 때 친구들과 미리 둘러보기 위해 방문했었다. 그때 방문에서 느낀 하회마을은 자연스러운 옛모습보다는 인위적인 모습이 지배적이었으며 자연스런 예스러움은 찾기 어려웠다.장삿속 느낌까지 강해 당시 일정에서 제외했었다. 첫 방문이었지만, 빠듀 씨는 같은 느낌이 들었었던 것 같다.
하회마을은 문화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빠지고 가장 불필요한 것만 남았다. 옛 마을이라면 그 속에 마을, 사람, 생활이 그대로 녹아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옛 방식의 생활을 원치않고 더 현대적이고 더 세속적인 것에 더 관심있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옛 방식 생활이 좋고 즐기고 녹아들어야만 방문자가 즐겁다. 엉성한 초가지붕, 정부지원으로 획일적이고 세련된 담장과 기와지붕 등 눈이 불편하다. 문화나 생활방식에 대해 조금만 알더라도 작위적인 느낌이 곳곳에 차있다. 단순히 먹고 마시기 위해 방문하는 국내의 일부 관광객이라면 큰 불평이 없을 것이다. 예스러움과 함께 옛맛을 찾는 여행객이라면 즐기기 어렵다. 마을 곳곳에 음식점이 불편할 정도로 많다. 식약청 위생품질 검사에 합격한 아스파탐 첨가 막걸리, 공장생산 토종닭, 정체불명 야채, 포장쌀 등으로 만들어진 음식에는 감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옛 방식으로 막걸리 만드는 할머니도 계시고, 마을에서 농사지은 콩으로 가마솥에 두부를 만드는 할아버지도 계시고, 한쪽에는 방앗간이 돌아가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빨래하는 아낙이 있고, 이쪽에는 닭들이 돌아다니고 저쪽에는 소들이 풀을 뜯는 자연스런 모습을 보고싶다. 마을 한구석의 주막에서 마시는 마을표 막걸리에 두부와 부침개를 안주로 먹고 싶다. 풍천의 좋은 쌀로 가마솥에 지은 밥과 된장을 먹고싶다. 감동하고 싶다.
안타까움
정부가 나서 지원을 시작하면 모든 것을 제대로 망치는지 알고 싶다. 최근엔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던 경주의 교동마을(교촌)도 정부의 지원으로 이상한 마을로 변했다. 옛집을 허물고 누각높이의 거대한 한옥스타일의 ‘흉물’을 올려놓았다. 집안 마루에 앉아서 즐기던 남산은 흉물에 가려져 버렸다.
최근 안동댐으로 수몰된 직후 이주한 예안의 한 마을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한다고 한다. TV에 자주 출연하는 유명인이 총감독을 맡는다고 한다. 비록 TV에서 쇼하던 디자이너이지만 예스러움의 참가치를 알면 좋겠다. 이 마을에는 60년대 70년대를 느낄 수 있는 한 지점이 있다. 나무 조각 하나라도 더하고 뺀다면 아스라한 느낌은 사라질 것이다.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콘텐츠 보완으로 개발되면 좋겠다.
서울과 부산에는 60, 70, 80년대의 모습을 지닌 곳이 많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들 골목과 마을의 가치가 인식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껏 삼청동, 인사동이 널리 알려졌을 뿐이다. 물론 아직은 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다. 인사동, 삼청동처럼 난개발되지 않았으니. 부산은 625라는 특수상황으로 만들어진 지역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모두 문화지역으로 지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무원, 개발자 눈에는 지저분한 ‘철거대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랍문화권의 메디나가 관광자원으로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안다면 달리 보일 텐데 안타까울 뿐이다. 앞으로 우리가 그리고 후대가 즐길 옛날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내가 이곳 청량산 자락을 좋아하는 이유는 예스러운 모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빠듀 씨 가족 역시 영주 부석사를 거쳐 이곳 외딴 곳을 본 후이니 어찌 하회마을을 즐길 수 있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리카에서 온 손님
시골마당에서의 식사도 즐겁지만, 준비한 막걸리와 음식 모두 맛있게 먹고 많은 이야기와 생각을 나눈 흔치 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기쁜 제안까지.
레위니옹에 여행 오길 바라며 레위니옹에서 먹고 지낼만한 호텔은 빠듀 씨 댁뿐이니 꼭 오라 청했다. 또한, 빠듀 씨는 파리에 아파트 두 채를 가지고 있으며 한 채는 비어있다 한다. 언제든 파리에 오면 우리가 머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이야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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