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좋아한다. 이곳 홈페이지에 가끔 방문하는 사람은 내가 감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사건이 발생했다. 같이 사는 분께서 갑자기 감자를 버려야겠다고 한다. 순간 철렁했다. “아까운 감자!” 내가 감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못먹고 버리다니. “안 돼”하고 감자를 봤더니 정말 싹이 많이 텄다. 감자를 버리자는 이유는 단 한가지. 보기에 끔찍하다는 것이었다. 순간 유럽에서 감자의 보급이 어려웠던 이유가 떠올랐다.유럽에 감자가 들어오고서도 본격적으로 소비가 시작된 것은 거의 300년 가까이 흘러서였다. 이유는 감자 싹이 필때 모습은 고름이 흐르는 듯 흉찍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선입견을 사라지게 만들고, 본격적으로 감자가 확산되는 데는 한 사람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예전에 들려주었건만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남미에서 7,000년 쯤 부터 먹기 시작한 감자는 스페인의 남미 정복과 잉카문명의 점령 이후, 1530년대에 유럽으로 건너간다. 스페인에서 시작하여 조금씩 소비가 되었지만, 천한 음식으로 여겼다.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 죄수, 병원의 입원환자들이 주요 소비자였다. 당시의 병원을 요즈음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당시는 주로 수도원같은 곳에서 수용되고 치유되는 거의 죄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대우를 받는 환자들이 대부이었다.
이런 천박한 음식, 감자에 대한 애착을 지닌 한 계몽주의 학자가 있었다. 장 자크 루쏘와 함께 아카데미 프랑세즈 경연에서 최고점수를 받은 그는 군인으로서의 활동도 열정적이었다. 프로이센과의 7년 전쟁동안 생포된 그는 죄수로 지내면서 감자의 좋은 점을 알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감자를 보급하려고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다들 회피하였다. 빠르망띠에 역시 프랑스인의 뛰어나 외교적 수완을 지닌 피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파리 외곽의 볼품없는 땅에 감자를 심었다. 그리고 감자밭 주변에 경비병을 두고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의 많은 집안 뜰에는 감자가 자라고 있었다. 유럽에 감자가 들어온 후 300년 가까이 흘렀지만 빠르망띠에 덕분에 감자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감자는 유럽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식량이 되었다.
그리고 감자는 역사도 바꾸었다. 1835년 휩쓴 감자잎마름병은 유럽을 황폐화시켰고, 감자를 주식으로 하던 당시 아일랜드의 인구를 반으로 줄여버렸다.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은 굶주림을 피해 신대륙으로 떠나는 배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아마도 감자질병만 아니었다면 미국의 아일랜드계는 수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1883년 프랑스 식물학자 알렉상드르 미야데가 감자질병을 치유하는 약을 만든 이후 지금까지 감자는 유럽의 가장 중요한 음식의 하나로 남는다.
우리나라 감자는 아쉽게도 유럽의 감자보다 많이 맛이 덜하다. 우리나라 감자는 드럼통에 구운 군고구마가 가장 맛있다. 유럽의 감자가 그립다. 퓌레, 튀김, 구운 것, 어떤 것이든 다 그립다.
그러나 맛이 못해도 우리나라 감자를 좋아하며 먹는다. 감자이니까.
감자를 못버리게 해야 될텐데 … 싹이 튼 감자를 어떻게 먹어야 할지 고민도 해야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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