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유럽을 여행할 때면 항상 자동차를 렌트하여 다닙니다. 자동차는 마치 발과 같아서 언제든 어디든 가고싶은 곳을 갈 수 있게 해 줍니다. 특히 생각지도 않은 곳도 갈 수 있게 만들기도 하죠. 그런데 이번 겨울여행에서는 곤란한 일을 겪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해서 남으로 가는 도로가 여럿 있지만 이번은 로카마두르를 방문하기 위해 툴루즈로 향하는 방향의 도로를 선택하여 내려갔습니다. 파리의 겨울은 낮이 아주 짧습니다. 보통 9시경에 밝아져서 4시 정도면 어두워집니다. 적어도 2시경에는 로카마두르에 도착을 해야만 제대로 주변을 둘러볼 시간이 나기 때문에 날이 밝기 전에 일찍 출발을 했습니다.
프랑스의 고속도로는 속도제한이 시속 130km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150km 내외로 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150km를 달린다면 마치 우리나라에서 110-120정도로 달리는 느낌이 듭니다. 고속도로가 막히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몸만 허락한다면 하루에 달릴 수 있는 거리는 상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날의 계획은 로카마두르 치즈만큼이나 예쁜 중세 마을인 로카마두르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를레앙, 샤또루, 리모쥬를 지났습니다. 시간은 2시를 향하고 있었고 예정대로라면 벌써 로카마두르에 도착했어야 하지만 염소치즈로 유명한 비엔느(Vienne)지방의 좋은 경치들을 놓치기가 힘들어 훨씬 많은 시간을 지체해버린 상태였습니다.
100km 남짓을 남겨두고 운전의 피로를 풀기 위해 에르(Aire)라고 불리는 도로상의 쉼터에 들렀습니다. 프랑스를 비롯해서 유럽 대부분 나라들의 쉼터는 화장실을 비롯해서 간단하게 음식도 먹을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는 재미도 휴식중에 놓치기 힘든 덤이기도 합니다.
잠깐을 쉰 후, 출발을 하려고 시동을 켜니 시동이 켜지질 않았습니다. 차의 상태를 보니 밧데리의 문제로 보였습니다. 렌트한 자동차는 프랑스 자동차의 대명사격인 르로(Renault)사의 최신형 라구나(Laguna)였으며, 300km 정도를 탄 자동차를 받았기 때문에 거의 새차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참고로 프랑스에서 Hertz, Avis, Europcar 등 주요 렌트카 회사에서 자동차를 빌리면 대부분 새 것에 가까운 것들입니다. 라구나(Laguna)라는 이 자동차는 시동시스템이 특이했습니다. 납닥한 카드를 카오디오 아래에 끼운 후 버턴만 누르면 시동이 걸리고 다시 한 번 더 누르면 시동이 꺼지는 식의 첨단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버턴을 누르면 ‘부르륵, 부르륵’ 하며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렌트한 헤르츠에 전화를 하니(헤르츠 직원들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문제가 없습니다.) 헤르츠에서는 우선 도로비상전화로 응급조치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응급조치를 한 회사에서 헤르츠에 경비를 청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응급전화를 하니 10분 정도 만에 구조차가 도착을 했고 시동문제는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아직 여러날을 더 다녀야 했기 때문에 가까운 도시인 리모쥬 헤르츠에 오펠이 한대 있다는 것을 연락받고 리모쥬로 향했습니다.
프랑스 자동차도 좋지만 여행에서는 꼭 신뢰할 만한 차가 필요합니다. 독일차들도 물론 고장은 나겠지만 그래도 잔고장이 더 적을거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독일차로 바꾸어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시간이 상당히 흘러, 시계는 4시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로카마두르는 내일로 미루는 것이 나을 듯하고 헤르츠 직원에게 주변에 들러도 좋을 만한 곳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직원은 콜롱브바루쥬(Colombe la Rouge)를 추천했습니다. 주변에 오래된 성들도 많고 경치도 좋아 볼 것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로카마두르와도 얼마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나는 곧 그곳을 향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날은 벌써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브리브라는 도시에 들어가서 수퍼에 들러 먹을 것을 조금 사고 기름을 보충한 후 콜롱브라루쥬로 다시 향했습니다. 콜롱브라루쥬로 가는 길은 상당한 공포를 조성했습니다. 이미 밤은 깊었고 주변은 산악의 느낌이었으며 길이 구불구불해서 아래는 절벽인지 강인지 도저히 분간이 가질 않았습니다. 주변에 불빛이라고는 간간히 지나는 차량외에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나는 차량이 뜸할 때면 더욱 낯선 곳에 대한 긴장이 강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곳을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저는 가끔씩 그런 상황들이 지났을 때의 기쁨을 알기 때문에 다른 생각없이 목적지를 향해 계속 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러 콜롱브라루쥬에 도착하였습니다.
조그마한 마을이었고, 비록 밤이었지만 예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루를 여기서 머무르기로 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호텔도 별도 없었고 겨울철 비수기라 호텔이 문을 닫았습니다. 6시 경이었지만 문을 연 식당 한 곳을 제외하고는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호텔부터 찾기로 하고, 콜롱브라루쥬를 나왔습니다. 아래로 향하던 중 우연히 지트(gite)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트는 산이나 들에서 동물과 함께 쉴 수 있는 숙소지만 요즈음 흔히 보기는 쉽지 않은 곳입니다. 간판을 보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불빛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포기를 하는 마음으로 차를 돌리려고 했지만 어두워 차를 돌릴 수도 없어 차라도 돌릴 곳을 찾기 위해 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 모퉁이를 돌면서 불빛을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기뻤죠. 그런데 그 느낌이 설악산의 장수대에 들어선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자동차들과 마치 방갈로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안으로 가니 안내소가 있었습니다.
안내소에 들어서니 바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며 즐기는 파티분위기였습니다. 안내소에 있는 사람에게 방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예약을 했는지 물었고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곳은 원칙상 예약을 해야하며 또한 현재 빈 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곤란한 표정을 짖고 있는 동안 다른 여자 한명이 왔습니다. 그사람은 차림새로 보아 매니저 같아보였습니다. 어떤 일인지 다른 여자에게 물은 후 방을 하나 내 주자는 분위기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 매니저는 다가오더니 방이 하루에 135프랑이며 식사는 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는 8시부터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가격을 물으니 아침,저녁 포함해서 102프랑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호텔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 아침, 저녁 포함해서 하루 숙박비가 237프랑이니 (우리돈 약 4만 2천원 정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트에서 하루를 잔다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오베르쥬라는 시골집에서는 여러번 잔 경험이 있지만 지트는 처음이었습니다.
건물은 모두 별장식이었습니다. 밖에서 방갈로로 착각한 것들이 모두 별장식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방을 안내 받고는 또 놀랐습니다. 방은 우리나라 콘도식이었고 아이들이 좋아할 수 있도록 다락방이 있었고 다락방은 침대와 테이블이 있었습니다. 큰방에는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되어있었고 방은 바닥부터 시작되는 큰창이 놓여있었습니다. 큰창에는 또한 문이 있어 방에서 바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되어있었으며, 차는 짐을 옮기기 쉽게 가까이 보이는 곳에 주차할 수 있게 배려해두었습니다. 모든 하나하나가 세심하게 신경쓴 흔적들로 가득했습니다.
저녁 8시, 배가 몹시 고팠기 때문에 정리하던 작업을 멈추고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식당으로 가니 테이블 세팅이 되어있었습니다. 이미 따로 마련해 둔 듯 했습니다. 옆에는 단체 손님들의 테이블이 세팅되어있었습니다. 한쪽은 쥬스, 콜라 등의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고 다른 쪽은 포도주 등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즉 한쪽은 어린이들의 자리일 것이며 다른 한쪽은 남자들의 자리일 것이라는 예상을 했습니다. 잠시 후, 50세 가량의 여자 한 분이 큰 그릇을 가지고 왔습니다. 수프였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식당에서 10명분은 넘을 정도의 양이었습니다. 먹고싶은 만큼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수프는 호박을 위주로 다른 여러가지를 넣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옅은 호박죽을 먹는 듯했습니다. 이렇게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는 이 호박수프 한그릇이 얼마나 편안하게 해주는지,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호박스프를 먹고 나니 옆에 있던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가 보였습니다. 1리터 병에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포도주를 조금 마시니 기분이 한껏 올라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바게트와 시골빵을 뜯어먹고 있으니 조금 후 식사가 나왔습니다. 저녁은 여러가지 햄이었습니다. 짙붉은 색의 햄은 보기에는 거부감이 들지만 아주 고소하여 정말 고기가 이런 맛이 날까 할 정도로 맛이 좋았습니다. 햄의 양은 많았지만 워낙 배가 고팠던 상황이라 조금은 부족감을 느껴 빵을 뜯어먹으며 옆에 도착한 옆테이블의 모임을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잠시후 그 여자분이 또한 접시의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저녁을 햄으로 먹었다고 했더니 이게 진짜 저녁이라며 그 접시를 두고 갔습니다. 접시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마그레드카나르(Magret de Canard)라는 오리고기와 감자가 있었습니다. 거의 생고기에 가까운 오리고기는 아무런 냄새도 없이 고소한 오리고기의 맛을 즐기게 해주었습니다. 이번 여행을 오기 며칠 전, 서울 정동극장 부근의 브라질 식당에서 특별메뉴로 나온 오리고기가 생각났습니다. 질기고 냄새나며 맛없던 그 오리고기가 생각났습니다. 부위는 똑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맛이 다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행에서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인 맛있는 요리의 즐거움을 뜻하지 않게 즐기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충분히 배가 불렀습니다. 같이 나온 와인도 어느듯 반 이상 마셨습니다. 기분도 더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접시가 나왔습니다. 치즈였습니다. 캉탈, 톰므, 로카마두르, 염소치즈, 블루도베르뉴, 타르타르, 요구르트 등이 큰 접시 하나에 담겨져 나왔습니다. 열명이 먹어도 남을 정도의 양이었습니다. 결국 좋아하는 치즈들은 남은 와인과 함께 형식적인 절차만을 거쳐야 했습니다.
모든 절차가 여기서 그치지는 않았습니다. 큰 덩어리의 케익이 디저트로 더 나왔으며, 커피를 한잔 하고 포도주를 다 마신 후에야 끝이 났습니다. 두시간 가량의 식사였습니다. 아마 여러 사람들이 같이 있었다면 세시간은 넘어갈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치즈투어를 한다면 다양한 음식을 좋아하고 포도주와 치즈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혼자서 즐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저녁이었습니다. 콜롱브라루쥬에서의 저녁은 아마도 평생 기억에 남을 저녁이 될 것 같습니다.
ㅎㅎ 읽다보니 참 긴 에세이 였어요.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여행은 마치 우리 인생의 짧은 드라마 같네요.
그 속엔 고난과 기쁨이 있죠^^